야설

미용실의 그녀 -하편

소라바다 293 08.22 14:24
얼마만의 여자와의 데이트 약속일까?

도무지 떠올리려고 해봐도 여자와 데이트했던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아주 오래된 기억일 것인데. 그 끝이 좋지 않아서였던 것일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긴 늘 혼자만의 짝사랑으로 끝이 나거나 어렵게 겨우 용기를 내서 고백했다가 차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여자와의 기분 좋은 데이트 기억이 남아 있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일 것 같기도 했다.

 

“금요일 오후 7시 시청역 앞. 금요일 오후 7시 시청역 앞...”

 

난 혼자서 계속 미친 사람처럼 약속 날짜와 시간을 계속 되뇌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잊어버리면 안 될 그날의 약속 장소와 시간을.

머릿속에 완전히 저장시키기 위해서 외우고 또 외웠다.

 

“꿈이 아닌 거지? 정말 그 사람과 데이트하는 건가? 혹시 날 놀리려고 하는 건 아닐까.? 아냐. 그런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어. 정말 착하고...예쁘고...”

 

혼자서 중얼중얼하며 망상을 하다 그녀의 모습이 또다시 떠오르고 난 나도 모르게 혼자서 바보처럼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5일을 기다리지. 어떻게...”

 

당장이라도 그녀와 만나고픈 마음에 5일이란 시간은 정말 너무나 길고 더디게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이란 놈은 아주 느리게 가더라도 흘러가긴 하는지 어느새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고 내일이면 그녀와 만나는 날이 벌써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두근대는 마음에 좀처럼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고,

덕분에 팀장으로부터 다시 멍청한 모습으로 돌아왔구먼. 이라는 잔소리와 함께 엄청난 타박을 받고 있었다.

 

그러면 어떠리.

난 팀장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이미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고 뭐라고 할 때마다 그저 빙그레 웃으며 다시 잘하겠다 하고 그냥 넘겨버렸다.

팀장은 그런 내 모습에 어이가 없는지 그저 허허거리며 웃기만 할 뿐이었고.

 

그러는 사이 다가온 D-day.

난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며 옷을 골랐다.

최대한 칙칙해 보이지 않으면서 조금이라도 젊어 보이는 정장을 고르고 생전 바르지도 않고 처박아 두었던 왁스를 바르고

거울에 내 모습을 몇 번이나 비춰 보았다.

 

“뭐. 잘 생기진 않았지만 이렇게 보니 오징어까진 아니네...”

 

혼자서 자화자찬하는 사이 너무 느긋하게 준비를 한 것인지 어느새 출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고, 난 서둘러 가방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따가울 정도로 햇볕이 내리쬐는 화창한 날씨..

당연히 내 착각이겠지만 오늘 그녀와의 데이트를 축복이라도 해 주듯이 날씨마저 좋으니 출근길에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그래..기분 좋은 일 있냐? 아침부터 싱글벙글이야”

“네..뭐..기분 좋게 살아야죠~”

“그래..뭐..우거지상 쓰고 있는 것보단 낫지. 어제까지 끝내놓으라고 한 보고서는 나한테 메일로 보냈어?”

“네~ 어제 보내고 퇴근했습니다”

“그래. 일단 그건 있다가 확인하고 가볍게 회의 한 번 하고 시작하자”

 

1초..1분..1시간..점점 약속 시간이 되어간다.

시계를 보는 횟수가 급격히 많아지고 타자를 치는 내 속도는

예전 처음 한컴 타자를 배울 때 기록했던 600타는 가볍게 넘을 정도로 불을 뿜는 속도와 함께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키보드 다 부서지겠네. 살살 좀 쳐. 가기 전에 요것만 하고 퇴근하고.”

“티..팀장님..!”

“왜? 오늘까지 꼭 보내야 하는 거라고. 얼마 안 되니까 금방하고 퇴근해”

“저..저..!!”

 

내가 안 된다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미 가방을 챙겨 이미 멀어지고 있는 팀장의 모습..

울분이 치솟는다. 이런 갑질의 횡포가 다 있단 말인가.!

 

시계를 보니 어느덧 6시가 조금 넘은 시간. 그녀와의 약속 시간이 1시간도 남아있지 않았다.

열을 내면서 하고 있던 일은 이제 조금만 하면 끝이지만 새롭게 팀장이 주고 간 업무..

시간이 너무나 빠듯하다.

하지만 그녀와의 약속도. 팀장이 시킨 일도 둘 다 놓칠 순 없었다.

난 정말 살면서 이렇게 열심히 그리고 빠르게 일했나 싶어질 정도로 미친 듯한 속도로 하고 있던 일을 마무리하고,

팀장이 던져준 보고서를 보며 빠르게 작업을 시작했다.

 

점점 다가오는 그녀와의 약속 시간..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알알이 턱에 맺히더니 손등에까지 떨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 신경 쓸 여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서서히 느려지는 키보드 소리...

그 소리가 이제 곧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고 마지막으로 검수를 마치고 이메일을 보내고 난 정장 윗옷을 집어 들고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6시 35분, 여기서 시청역까지 걸리는 시간은 최대한 빨리 잡아도 30분.

도저히 견적이 안 나온다.

 

“아. 택시를 탈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며 머리가 복잡해져 온다.

퇴근 시간에 서울 한복판을 향해 택시를 타고 간다는 건 분명 정신 나간 짓이었지만

지하철로는 도저히 약속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생기지 않았다.

 

어느새 도착한 1층.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아. 모르겠다. 택시는 아냐. 더 늦을 거야.”

 

결국 난 지하철을 타기로 마음먹고 회사건물에서 한 발자국 내딛는 순간 쏴 거리는 시원한 소리와 함께 빗줄기가 몸을 때리기 시작한다.

 

‘이런....’

 

한 시간이나 일찍 일어나 준비하면서도 미처 일기예보는 점검하지 못한 것이다.

갑자기 퍼붓는 소나기라니.

 

날은 전혀 흐리지 않고 오히려 너무나 맑았는데, 그 맑은 하늘에서 마치 구멍이 뚫린 듯이 미친 듯이 비를 퍼붓고 있었고

지하철역까지 5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를 걸어가며 내 몰골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있었다.

사고 3년 동안 한두 번 꺼내 입을까 말까 한 정장도. 아침부터 열심히 손질한 구두도.

살면서 5번 정도 왁스를 발라 봤을까 싶어질 정도로 오랜만에 한 머리 손질도 모두 엉망이 되어 있었다.

 

급격히 밀려오는 허탈함. 그리고 비를 맞으며 멈춰버린 손목시계.

한 번도 비를 맞은 적이 없었던 시계라 몰랐는데 오늘 처음으로 알게 됐다.

내 손목시계가 방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 유품인

고장 나버린 손목시계를 물끄러미 한참을 바라보다 어느새 지하철은 시청역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하아...뭐..내가 그렇지...”

 

어쩐지 너무 쉽게 그녀와의 약속이 잡히고, 아무런 일없이 순조롭게 그녀와의 약속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운이 없던 내가. 늘 행복보단 불행이란 단어에 훨씬 가까웠던 내가.

 

시간은 이미 7시 15분.. 약속 시간이 15분이나 지나 있었다.

너무나 정신없는 통에 그녀에게 늦는다는 연락 한 번 못했기에,

15분이나 이미 지난 지금 그녀가 당연히 가버렸을 거라는 생각과 함께 난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천천히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씩 입구로 다가갈수록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살.

언제 비가 왔냐는 듯 늦여름의 해는 7시가 넘었지만, 아직도 떨어지지 않고 그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역시나 없겠지.”

 

걸음이 멈추고 입구에 도착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했지만 조금은 아쉬운. 쓴 입맛을 다시며 돌아서려는 순간 뒤에서 환청인 듯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늦으셨네요.”

 

눈 부신 햇살만큼이나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 그녀가 그곳에서 날 기다리며 서 있었다.

 

“왜. 안 갔어요.”

“어어. 그거 첫 번째 인사치고 무지 이상한 거 알죠? 내가 가길 바랐어요?”

“아니. 그건 아닌데. 너무 늦어서. 옷. 옷은 왜 이래요?”

 

그제야 그녀의 옷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머리도..

그녀도 나와 같이 소나기를 그대로 흠뻑 맞은 것이다.

 

“원래 좀 미리 나오는 습관이 있어서. 날씨도 좋고 해서 지하철역에서 나와서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확 쏟아지더라고요.

일기예보도 못 봤고. 오늘 날씨도 너무 좋고 해서. 비 올 거란 생각을 못 해서..그래서 뭐..쫄딱 맞았죠..”

“바보...왜 그냥 맞아요..비를..”

“너무 확 쏟아져서. 피하기도 전에 그냥 다 젖었어요. 그러는 아저씨는 몰골이 왜 그래요? 같이 비 맞은 거 같은데요. 헤헤..”

“지금 웃음이 나와요...?”

“그럼 울까요??”

 

너무나 천진난만하게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

나라면 너무나 화가 났을 거 같은데 어떻게 저렇게 웃으면서 말할 수 있을까..

비에 젖은 모습인데 왜 이렇게 사랑스럽고 예쁜 것일까..

 

어느새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다 나도 그만 바보같이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그거 봐요. 웃으니까 좋잖아요.”

“아..몰라요. 나까지 바보가 된 거 같아..”

“바보? 그런가..흐음..그런데 여기 계속 이렇게 서 있을 거예요?”

“아..내 정신..”

 

그제야 정신이 번쩍하고 돌아온다. 5일 동안 준비한 그녀와의 데이트..

살면서 데이트를 해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기에 주위 사람들 그리고 인터넷을 수소문하며 괜찮은 맛집과 데이트 장소를 일일이 메모장에 적어 뒀었다.

 

그런데 그 메모장이 어디 있지.....?

아..그제야 생각이 났다.

오늘 아침 입사 동기인 민주에게 커피를 사주며 여자가 좋아할 행동이나 제스처, 대화법 등을 적어서 사무실 책상 위에 올려둔 사실이..

 

‘아..망했다....’

 

이런 걸 두고 진퇴양난이라고 하던가..아니..설상가상인가..

어떻게 이리도 지지리 운이 없단 말인가.. dj doc의 머피의 법칙은 정녕 나를 위한 노래였단 말인가..

 

“에에..계속 그러고 있을 거예요?? 혹시 데이트 준비 못 하셨나? 그럼 따라오세요~~”

“어...저..저..!”

 

어느새 내 손을 이끌고 씩씩하게 걸어가기 시작하는 그녀..

이미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 멍을 때리고 있던 나는 그녀의 손길에 이끌려 데이트를 시작했고 하루 종일 그녀가 나를 인도했다.

어떻게 입 안으로 들어갔는지 모르게 멍한 상태로 저녁 식사를 하고..

한눈에 봐도 여자들이 좋아할 법한 예쁘장한 인테리어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그녀는 쉴 새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늘어놨다.

 

“어. 나만 이야기 하는 거 알아요? 에이. 재미없어. 일단 나가서 좀 걸을까요?”

“어..네에..”

“밥은 아저씨가 샀으니까 요건 내가 계산할게요~”

 

그녀는 내가 미처 계산하기도 전에 계산서를 들고 나갔고, 난 엉거주춤하게 그녀의 옆에 서 있다가 그녀를 따라 나갔다.

아까는 해가 걸려 있었는데 어느새 어두워진 밖. 우리는 말없이 한참을 걸었다.

그리고 난 그녀에게 조금씩 미안한 감정이 밀려왔다.

 

“저..미안해요..실은..”

“실은 뭐요...?”

“이런 이야기 하면 참 바보 멍청이란 소리 듣겠지만. 일주일 동안 오늘을 위해 준비해 뒀던 메모장을 회사에 두고 왔어요..

그래서 어..약속시간도 늦었고..아침부터 준비했는데 이미 몰골은 엉망이 됐고. 지금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너무 잘 보이고 싶었는데 엉망이 돼버려서.”

“그래서 그러고 있었던 거예요.? 말도 없이 시무룩하게.?”

“네에...”

“우와. 아저씨 데이트 첨 해보죠?”

“아니. 처음은 아닌데. 처음이나 마찬가지인.”

“그런 거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그냥 아저씨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모습인지 가식 없이 숨김없이 그대로 보여주면 돼요.

억지로 날 웃기려고 할 필요도 없고..”

“어...음.....”

“그날 그렇게 용기 있게 나에게 데이트 신청한 아저씨의 모습이 좋았어요. 고작 두 번째 만남이었는데. 그것도 손님과 고객 사이로..

그날 거짓 없이 순수하게 호감을 드러내고 있던 아저씨의 모습이 좋아서 승낙한 거라고요. 그런데 이런 모습으로 날 실망하게 할 거예요?”

 

내 손을 꼭 잡고 환하게 미소 짓는 그녀.

그런데 왜 눈물이 나려고 하는 걸까.

 

바보같이 첫 데이트에서 우는 모습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너무나 바보 같을 것 같다는 생각에 좀처럼 심호흡을 해보고

눈에 힘을 줘 봐도 고여 있는 눈물은 좀처럼 멎을 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더 그렁그렁 눈에 맺히고 있었다.

 

“어..울어요...왜....?”

 

여자들은 감정에 교류를 잘한다고 하던가.

환하게 웃고 있던 그녀의 모습이 울상으로 변하더니 어느새 눈물이 맺히기 시작한다.

 

“울지 마요. 나 아저씨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아저씨가 싫지 않아. 아니 조금 좋은 거 같아요.

그런데 그렇게 우는 모습은 싫어요. 너무 슬퍼 보이잖아요.”

 

그녀의 얼굴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그녀는 말없이 나의 품에 꼭 안겨 왔다.

따뜻한 그녀의 체온. 마음이 조금씩 평온해지기 시작한다.

얼마 만에 이런 기분 좋은 느낌을 느껴보는 것일까.

 

이제는 아예 기억이 남아 있지 않은 어릴 때 집을 나가 버린 어머니에게서 느껴봤을까.

아니면 대학교 신입생 시절 짝사랑하던 한 학년 선배의 손을 축제 때 잡았을 때 느껴봤을까.

 

그런 기억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오랜만의 너무나 포근하고 기분 좋은 느낌을

난 그녀에게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오래도록 이 느낌. 이 감정을 만끽하고 싶었다.

 

얼마나 그렇게 서로를 꼭 안고 있었던 것일까..

볼이 발그레해진 그녀가 나의 품에서 쏙 빠져나왔다.

 

“나 그렇게 쉬운 여자 아니에요. 갑자기 막 안기고 그래서 오해하면 안 돼요.”

“그런 생각 안 해요..”

“정말이죠?”

“그럼요...”

 

그리고 그 순간 처음으로 난 그녀의 앞에서 그녀의 도움 없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가식 없는.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얼마 만에 이런 웃음을 보였던 것일까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기분 좋은 웃음을..

 

“좋잖아요..그렇게 웃으니까..이제는 울지 마요..내 앞에서..”

 

난 그녀를 향해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고 이제는 내가 먼저 그녀를 내 품에 꼭 안았다.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밤이 깊어가는 시간 동안 오래 끌어안고 서로의 따뜻한 체온을 느꼈다.

 

“이제 그만..가야 할 거 같아요. 너무 늦었어..”

“어..그러네요..”

 

그녀는 수줍은 미소와 함께 내 품에서 떨어지며 시계를 가리켰고, 어느새 시간은 10시를 훌쩍 넘어 1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와의 하루가 이렇게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아쉬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오늘 너무 즐거웠어요..그리고 다음번에는 그 계획해뒀다던 데이트 기대하고 있을게요”

“그럼 애프터 성공인 건가요...?”

“어..일단은요...아! 내 이름 아직 모르죠..? 휴대폰 잠시 줘보실래요?”

 

내가 휴대폰을 내밀자 그녀는 자기 번호를 검색하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미용실의 그녀라니..너무 로맨스 소설 같은 이름 아니에요?”

“아..그게 이름을 모르니. 저장하기가 애매해서.”

“뭐..나쁘진 않네요. 제 이름으로 바꿔서 저장해뒀어요. 제 이름은 초희에요. 이초희..”

“초희...이름이 예쁘네요. 제 이름은..”

“알아요~ 민수.. 김민수 맞죠? 그때 아저씨 휴대폰에 내 번호 저장하다가 보려고 본 건 아닌데 문자 와 있어서 봤어요”

“아..그랬군요. 맞아요. 김민수..”

“그럼 이만 가볼게요~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저. 바래다 줄게요!”

“괜찮아요~ 다음에...”

 

그녀는 어느새 손을 흔들며 저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초희...이초희...”

 

자꾸만 입에 맴도는 그녀의 이름. 난 집으로 가는 내내 그녀의 이름을 되뇌며 잘 들어갔냐고 연락할까 말까 망설이며 계속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어느새 내 발걸음은 집 앞까지 도착해 있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 발신음과 함께 울려오는 그녀의 카톡..

 

-잘 들어갔어요? 난 이제 도착해서 씻고 나왔어요

-어..난 방금 도착했어요. 감기 안 걸렸어요? 비 맞아서..

-나 생각보다 튼튼해요..헤헤..아저씨나 어서 씻으시죠~

-저..그런데 초희씨..이름이 무슨 뜻이에요..? 궁금해서..자꾸만 입에 맴도네요..이름이..

-그래요? 슬퍼할 초..기쁠 희에요..아버지가 어릴 때 슬퍼도 웃으라고 그렇게 지어주신 이름이라고 하더라구요..

-아..그런 뜻이..

-넹~ 이제 궁금증이 풀리셨나요? 전 피곤해서 먼저 잘게요..얼른 씻고 자요~!!

-네..잘 자요..

 

“슬퍼할 초..기쁠 희..초희..”

 

그녀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어떤 슬픈 일이 있어도,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환하게 웃음 지을 것 같은 그런 이름..

문득 오늘 너무나 환하게 웃다가 내가 우는 모습에 덩달아 같이 울던 그녀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린아이처럼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울먹이며 나에게 안겨 오던 그녀의 모습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찌릿 거리는 느낌과 함께 얼굴에 환하게 미소가 번져온다.

이런 게 사랑이란 감정인 것일까.. 내 인생에서도 이런 감정이 찾아오는 것일까..

뭐..사랑이라고 하더라도 혹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오로지 지금 이 느낌을 이 감정을 고스란히 그대로 느끼고 싶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행복이란 이 느낌을...

 

사람이란 적응의 동물이다.

그것이 슬픔이 되었든..기쁨이 되었든..

 

난 정말 놀랍게도 슬픔..우울함이란 감정만을 가지고 살아왔던 인생에서 180도 달라진 인생을 살고 있었다.

나에게 마법처럼 찾아온 그녀는 늘 나에게 웃음, 기쁨 그리고 행복이란 감정만을 안겨다 주었고,

난 더 이상 어떤 힘든 순간에도 좌절하지 않고 그녀의 이름처럼 웃음을 짓고 있었다.

 

“사랑해..”

“사랑해 나도 당신을....”

 

우리는 왜 이제야 서로를 만났냐는 듯이 못 만나는 시간 동안 서로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만나는 시간 동안 서로를 아낌없이 사랑했다.

 

1주..1개월..그리고 11개월..

어느덧 그녀와 정식으로 교제를 한 지 11개월이란 시간이 지나 있었다.

난 조금씩 그녀와의 결혼 생활을 꿈꾸기 시작했고, 내 인생의 목표는 성공이 아닌 그녀와의 결혼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아.. 오빠 할아버지 기일 이제 다 돼가지 않나?”

“어? 어어..그러고 보니 벌써 다음 주네..”

“같이 갔다 올까?”

“제사 저녁 늦게 지내서 하룻밤 자고 가야 하는데 괜찮겠어?”

“뭐..괜찮아..”

 

그날 처음으로 그녀는 나와 교제 후 1박 2일의 시간을 허락했다.

물론 여행을 가는 게 아니라 할아버지 기일을 챙기기 위해 가는 것이지만 그런 시간을 허락해 준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고마웠다.

하룻밤을 같이 보낸다는 건 서로에게 조금씩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니..

 

다가온 할아버지의 기일..

그동안 그녀와 만난다고 그 후 한 번도 고향에 내려가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그녀와 1박 2일 동안 같이 있을 수 있다는 설렘이 뒤섞인 묘한 감정으로 난 거의 1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 다시 고향을 찾았다.

 

여전히 변함없이 깨끗하게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할아버지의 집..

아마도 정태 할아버지가 그동안 신경을 써주고 계셨던 것이겠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제사 음식 냄새가 코를 간질이고 있었고 방 한 가운데는 정태 할아버지가 앉아서 제사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왔나? 어이쿠~ 뒤에 그 예쁜 아가씨가 네가 말한 그 아가씨가?”

“네? 아..네...하하...”

 

난 멋쩍은 미소와 함께 머리를 긁적였고, 뒤에 있던 그녀는 앞으로 나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이초희예요. 오빠한테 말씀 많이 들었어요. 신경 많이 써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감사할 게 뭐 있어~ 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니 하는 거지. 그렇게 서 있지 말고 들어와서 앉거라. 점심은 먹었고?”

“네. 내려오면서 휴게소에서 먹었어요”

“그래. 잘했네. 민수 너 뭐하나? 어서 와서 앉거라. 네가 그렇게 하고 있으니 이 아이도 못 앉고 서 있는 거 아니냐?”

“아..네..”

“제가 뭐 도와드릴 건 없을까요? 이리 주세요. 제가 할게요”

“너는 손님이다. 손님은 가만 앉아 있거라”

“그래도..”

“어허~! 어른이 말을 하면 들어야지”

“네...”

 

그녀는 정태 할아버지를 도와주려다 계속 가만있으라는 말에 설거지라도 해야겠다며 빈 그릇들을 가지고 부엌으로 들어갔고,

정태 할아버지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올렸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하지. 옛말 틀린 게 없는 거라. 재주도 좋네.”

“제가 뭘 한 게 있나요. 그냥 고마워요. 저에게 과분한 사람이라..”

“서로 좋아하는 사이에 과분하고 그런 게 어디 있나.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다. 좋아하는 사이에 누가 더 낫고 안 낫고 그런 게 없는 거라.

“할아버지도 초희랑 똑같은 말을 하네요.”

“그렇나? 똑똑하고 현명한 아가씨를 잘 만났네. 우리 민수가..”

“네..그런 거 같아요...”

 

 

정태 할아버지는 온종일 제사음식부터 제사까지 일일이 모두 도와주시고,

제사가 끝이 나고 뒷정리가 다 끝나고 나서야 나에게 좋은 시간 보내라며 윙크를 하고는 문을 닫고 나가셨고,

다시 깔끔하게 정리된 방에는 그녀와 나 둘만이 남게 됐다.

 

“친할아버지는 아니지만 참 좋은 분 같으셔.”

“어..그렇지..나한테는..이제 친할아버지 같은 그런 분이니..”

“그래..아~! 맞다 우리 오빠 앨범이나 한번 볼까? 어릴 때 어땠나.”

 

그녀는 구석에 놓여 있는 앨범을 꺼내 한 장 한 장 넘기기 시작했다.

사진 속 할아버지와 나의 모습. 일 년 전 이곳에 왔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땐 참 힘들었는데. 세상이 다 끝난 것 같았는데.

이젠 이 세상에 나 혼자뿐. 내가 내일 죽어도 아무도 슬퍼할 사람은 없을 것 같았는데.

 

불과 1년 사이에 참 많은 게 변해 있었다.

물론 그 변화의 중심엔 그녀..초희가 있었다.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날 늘 웃게 해주는 그녀가..

 

“어..이게 끝인가..졸업사진...웁....”

 

난 마지막 장을 넘기며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입술에 부드럽게 내 입술을 맞췄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다 눈을 감았고, 그녀의 눈이 감기는 걸 보며 나도 눈을 감고 그녀의 감미로운 입술을 느꼈다.

한참 동안 쪽쪽 소리가 나게 서로의 입술에 뽀뽀를 하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이 열리며 내 혀가 그녀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갔고,

서로의 혀가 뒤엉키며 입 안으로 뜨거운 입김을 내뿜었다.

 

“사랑해..오빠..”

“나도...나도 사랑해 초희야...”

 

내 손은 그녀의 옷을 꼭 붙들고 있었고, 그녀는 눈가에 살짝 눈물이 고인 체 환하게 웃어 보였다.

 

“하지..말까...?”

“아니...조금 긴장은 되는데 괜찮아..”

 

괜찮다는 그녀의 말에 용기를 얻은 나는 천천히 하나씩 그녀의 옷을 벗겨냈고, 어느새 그녀의 몸엔 한 장의 천만이 그녀의 몸을 가리고 있었다.

 

“정말 괜찮겠어? 싫으면...”

“아니..괜찮아..오늘..꼭 오빠한테 허락해주고 싶어..”

 

그녀의 눈빛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고, 마지막 남아 있던 그녀의 몸을 덮고 있던 천을 모두 제거하자 그녀의 눈부신 나신이 그대로 드러났다.

창호지 문으로 파고드는 달빛에 비친 그녀의 나신은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봉긋하게 솟은 가슴을 따라 떨어지는 잘록한 허리..그리고 볼륨감 있게 나와 있는 골반 라인까지..

내 입에선 나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고, 한참을 넋을 놓고 바라보는 내 모습에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계속 그렇게 뚫어지게 볼 거야...?”

“어..? 어어..미안..너무 아름다워서..”

“피...거짓말..”

“아니..진짜야..정말...”

“정말....?”

 

눈물이 맺혀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녀는 내 칭찬에 다시 환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고, 난 그녀의 나신에 뜨겁고 열정적으로 입을 맞췄다.

내 손길에 내 몸짓에 조금이라도 그녀가 다칠까 봐 조심스럽게 내 손길과 내 입술은 그녀의 몸을 탐했고..

아무런 반응이 없던 그녀의 입에서 조금씩 흘러나온 소리에 내 몸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어느새 완전히 뒤엉켜 하나가 된 그녀와 나..

우리는 서로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서로의 몸을 원하고 있었고..

드디어 처음으로 그녀와 난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

 

서로가 처음인지라 조금은 서툴고 힘들고 아프게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소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고 우리는 완전히 서로를 느끼고 있었다.

 

“사랑해 오빠....나 오빠가 너무 좋아..”

“나도..나도 좋아..처음 본 그 순간부터..네가 너무 좋았어..”

“정말...정말 그랬어...? 나 계속 많이 사랑해 줄 거지..?”

“응..그럼..”

“내가 부모님이 없는 사람이라도 상관없어...? 고등학교 밖에 나오지 않았어도..?”

“응..상관없어...”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니..오늘은 술이 너무 마시고 싶다며, 무슨 일인지 물어도 아무런 말 없이 술만 잔뜩 마시고는 잔뜩 취한 상태에서 흐느끼면서

나에게 부모님이 어릴 때 돌아가셨다고 그래서 꼭 양가 부모님이 있는 사람과 만나고 싶었다고..

그런데 오빠가 양가 부모님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솔직히 조금 고민이 됐다고...

하지만 마음이 결국 변하진 않았다고..이렇게 혼자서 저울질한 내가 너무 나쁜 년이라고..미안하다고 울던 그날..

그날 결심했다. 내가 평생 이 사람을 지켜주겠다고..먼저 내 손을 놓치지 않는다면 평생 이 사람과 함께 하겠노라고..

 

“왜 상관없어...난...난 오빠한테 너무 모자란 사람인데...왜...”

“네가 말했잖아. 사랑에 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고..우리가 사랑하는데 그런 게 뭐가 필요하냐고...”

“바보...바보....”

 

초희...그녀가 울고 있었다.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 뺨을 타고 흘러내리며 울고 있었다.

그런데 입가엔 미소가 그려지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처럼...

난 울고 있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녀를 내 품에 꼭 끌어안았다.

 

“나에겐 세상 그 누구보다 나에게 넘칠 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이야 당신은...그래서 말하는데 나와 결혼해 주지 않을래...?”

“지금 프로포즈하는 거야...?”

“어..정식은 아니고..정식으론 세상 그 누구보다 멋지게...행복하게 프로포즈 해 줄게..”

“아니..지금이 좋아..그냥 좋아...오빠랑 결혼할래...”

 

태어나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 태어나서 가장 잘했던 일..

그게 오늘이지 않을까..

그녀의 프로포즈 승낙은 세상 그 어떤 말보다 달콤하고 기분 좋은 말이었고,

우린 그날 밤새도록 달콤한 사랑을 나눴다. 서로의 밀어를 속삭이며.

 

어느새 밝아오는 아침.. 우린 아침 해가 뜨는 걸 보고 비로소 잠이 들었고,

일어나니 이미 오후가 한창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 올라가야지.”

“으응..”

 

나는 올라가기 전 마지막으로 방에 걸려 있는 할아버지 사진을 향해 넙죽 절을 했다.

 

“할아버지, 이제 제 걱정하지 마시고 편안하게 하늘나라에서 쉬셔도 될 거 같아요. 이제는 할아버지만큼 절 아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 제 곁에 있거든요.

그동안 할아버지한테 다 못 해 드렸던 사랑.. 이 사람에게 베풀면서 행복하게 살게요..

할아버지. 그곳에서 잘 기다리고 계시면 저도 나중에 이 사람이랑 같이 그곳으로 따라갈게요..그곳에서 우리 함께 행복하게 살아요..”

 

할아버지에게 전하고 싶던 마지막 말..꼭 보여드리고 싶었던 예쁜 색시의 모습..

뒤늦게라도 전할 수 있어 다행이었고..난 더 이상 이런 말을 하면서도 울지 않았다.

 

“할아버지. 잘 지내고 계세요. 또 찾아뵐게요...”

 

그녀가 내 팔에 팔짱을 끼며 웃으며 할아버지에게 마지막 말을 전했고, 우리는 집에서 나와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다시 이곳을 찾아올 그날을 기다리며..그때는 둘이 아닌 셋의 모습으로 할아버지에게 더 큰 웃음을 안겨줄 행복한 상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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